사범대학 시기(1951 - 1962)
  이화여자대학교의 물리학과는 사범대학 소속으로 1951년에 인가되었다. 그러나 4년 후인 1955년에 제 1회 신입생을 받아서 교육을 시작하였다. 1954년 4월부터 이화여대에서 의예과의 일반물리학 강의를 하였고 그 당시에 1학기 동안 물리학과의 학과장을 맡았던 이상수(李相洙, 한국과학원 교수 역임, 은퇴)는 그때를 회고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육이오전쟁이 끝날 무렵 나는 3년간의 긴 세월 동안 입고 있던 군복을 벗고, 나의 본직인 물리학공부를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서울에 내려와 있던 중 하루는 고 한심석(韓沁錫, 이대 의대학장, 후에 서울대 총장)한테서 연락오기를 이대 의대 예과의 일반물리학 강의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이것을 반가이 맞아들인 것이 바로 내가 이대와 인연을 맺게된 처음 일이다. 그후, 가을철 어느 일요일에 김옥길(金玉吉) 이대교무처장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곧 만났으면 좋겠다는 뜻이어서, 만나보니 바로 이대에 물리학과를 창설할 것이니 준비해달라는 말이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대단히 반가워했으며 즉시 제반준비를 해서 1955년에 신입생을 맞이하게 되었다. 다행히 제1기생의 학생수는 많지 않아 20명 미만으로 기억하며, 그들의 일반물리학실험을 위하여 일요일에도 학교에 나와서 분주해하던 일들이 기억에 남아있다.”
  그해 가을에 이상수는 김활란(金活蘭) 총장의 “너그러운” 추천서에 의해 영국문화원 장학금을 받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백동기(白東基, 1955 - 1991)가 그 후임으로 부임하여 학과장을 맡게 되고 그로부터 1962년까지 7년 동안 학과장으로 일하였다. 백동기는 1995년에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당시의 보직관례는 지금처럼 정규연한제가 아니고 일단 선임자가 과장을 맡으면 긴급한 사태가 아니고는 교체가 불가능하여 과장은 그 과의 모든 인사, 행정에 책임을 져야 하는 하나의 희생물이 되어 과를 관리 운영해야 했다.”
  그 당시 이대 물리학과에는 백동기와 더불어 진홍종(晋洪鐘, 1956 - 1972), 강세영(姜世榮, 1958 - 1965, 교수 부임 이전부터 강사로 강의하였음) 그리고 초창기부터 기초과목을 맡은 유은산(劉銀山) 조교가 있었으며 이 4인의 교수진으로 교과과정의 전과목이 정상적으로 운영되었다. 이상수는 1959년에 귀국하여 한 학기 강의하고 유학시 장학금을 받았던 원자력연구소로 곧 옮겨갔다. 1957년에는 학과별로 뽑던 신입생을 자연학부, 인문학부로 나누어 선발하는 새로운 시도를 하였으며, 물리학과는 과학관에서 학생관으로 이전하여 전보다 여유있는 공간을 확보하게 되었다. 같은 해에 한국학생물리학회가 발족되어 학회지 「우주(universe)」를 발간하기 시작하였고, 해마다 체육대회도 개최하였는데 이대 물리학과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58년에는 UNKRA의 원조로 기본적인 물리기자재를 도입해서 학생들이 보다 충실한 실험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해 여름방학에는 제1회 졸업예정자들과 교수들이 제주도에 가서 한라정상과 서귀포지상에서의 “중력가속도”와 “우주선의 동서효과” 등을 측정하여 그 결과를 이화여대 중강당에서 발표하였다.
  1959년 2월에 드디어 물리학과 제1회 졸업생 11명을 배출하였다. 이들은 55학번 학생들이다. 그후로 56, 57, 58, 59, 60, 61학번 학생들이 각각 12명, 6명, 8명, 13명, 12명, 13명씩 해마다 졸업하였다. 위의 졸업생의 숫자로 볼 수 있듯이 물리학과 지망생수는 별로 많지 않은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결국 1961년 11월 18일에 물리학과는 군사정부의 대학정비법에 의하여 사범대학에서 폐과되었다가 약 1년 후인 1962년 12월 19일에 문리대학 소속으로 복과되었다. 따라서 1962년에는 신입생을 뽑지 못하였다.
  그 당시의 우리나라에서 여성에게 자연과학을, 그중에서도 물리학을 교육시키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학생을, 특별히 우수한 학생을 유치하기 위하여 교수들은 자신과 연관이 있는 고등학교를 찾아다니면서 설득작업을 하는 등 여러 가지로 노력을 하여야 했다. 그 결과 몇명의 우수한 졸업생을 배출할 수 있었다. 1962년과 1963년의 수석졸업자가 물리학과에서 나온 것이다. 이화여대 물리학과의 유아기는 현상유지 정도의 조용한 시기였으나 여기에서 우리나라 여성물리학자들의 꿈이 잉태되고 있었다.

문리대학 시기(1962 - 1982)
  사범대학에 소속되었던 자연과학계열 학과가 문리대학으로 전속되면서 어떤 발전의 기회가 오지 않을까 기대를 했으나 약 20년간의 긴 세월 동안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이학부 없이 11년 동안이나 문리대학을 존속시켜 온 것으로 미루어보아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이화여대가 인문학 위주로 대학교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4명의 교수가 새로 임용된 것 이외에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교양학부 소속이던 태정학(太正學)이 캐나다 유학 후에 전속해 왔고(1961 - 1986), 물리학과 5회 졸업생 신승애(辛承愛)가 새로 임용되었으며(1966 - 현재, 원자핵물리학 실험) 시청각교육원에 있던 정병두(鄭秉斗)가 다시 전속되어 왔고(1968 - 2001), 물리학과 4회 졸업생 모혜정(毛惠晶)이 미국 루이지애나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취득 후 새로이 부임하였다(1971 - 현재, 고체물리학 이론). 한편 강세영(姜世榮)은 1965년에 학교를 떠나 불편한 몸을 지팡이에 의지한 채 아르헨티나로 가족과 함께 이민갔고 진홍종은 1978년에 지병으로 별세하였다.
  1975년과 1976년에 백동기와 태정학이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구제도에 의한 박사학위를 각각 광학과 고체물리 실험분야에서 받았다. 그리고 1980년에 신승애가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신제도에 의한 박사학위(원자핵물리학 실험)를 취득하였다. 이 시기에 신촌에 있는 3개 대학원(이대, 연대, 서강대) 사이에 학점교환 제도가 시행되어 대학원학생들이 오가며 강의를 들을 수 있었고 대학원 학위논문 실험은 원자력연구소, KIST, 연세대학교 등에 학생들을 보내어 지도받게 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 19명의 물리학 석사를 배출하였다. 1970년대 초부터 다시 학부제로 신입생을 선발하게 되어 물리학과의 학생수가 한자리수로 떨어지는 위기를 맞았으나 몇년 후에 다시 학과정원제로 돌아가 위기를 면했다. 이 문리대 시절에는 시간강사를 많이 활용하였다. 1967년을 전후하여 1982년까지 도와준 강사들은 다음과 같다. 김상돈, 양인기, 이영재, 김기수, 김준명, 민광식, 이철주, 정원모, 정중현, 김도경, 고년규, 김희상 그리고 김현창, 김영함, 김순식, 윤대병, 현정준, 김현남, 윤석상 등이다. 모두 다 애정과 열성을 가지고 강의해 주었다.
  1967년 4월 이화여대 물리학과 주최, 한국물리학회 주관으로 제 14회 한국물리학회 정기총회 및 연구논문 발표가 이화여대에서 개최되었다. 당시 이화여대 물리학과는 전용공간의 부족과 시설미비로 열악한 상태였으나 교수들과 학생들이 협력하여 시종일관 정겨운 분위기 속에서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었다.
  물리학회 개최 직후에 학생들은 물리학 연구회를 발족시키고 6월에 Ewha Physics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이 학회지는 후에 「이화 - 자연」으로 발전되었으며 1970 - 1975년까지 6회에 걸쳐 출간되면서 많은 학생들이 연구결과를 발표하였다. 백동기는 1995년에 문리대 시절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문리대학에 소속된 20여년에 걸쳐, 자연과학부는 발전은커녕 여전히 그동안 원조 및 구입한 실험시설마저 점차로 노후 파손·마모되어 사용이 불가능한 극단적인 영세현상만이 가중되어 가는 현황이었다. 1970년대만 해도 전국의 타대학은 경쟁적으로 공간의 확보 또는 확충은 물론 충분한 그리고 고차원, 고성능실험 연구용의 계측기 설비의 완비를 위하여 거교적인 차원에서 연년으로 IBRD, OECD의 차관까지 동원하여 막대한 양의 기자재를 구입해 갔다. 우리는 그냥 선망의 눈과 마음으로 애타게 기다려야만 했다. 솔직히 말해서 전국의 대학 중 우리 이학부가 가장 최하위의 현황이었음을 부인할 도리가 없었다. 그 기막힌 환경 속에서도 교수와 학생들은 용기를 더욱 공고히하며 각자의 의무에 충실하였다. 천혜라고나 할까 당연한 귀추라고나 할까 1980년대에 이화여대 발전계획은 시대적 요청과 강력한 탄압에 순응하여 다음과 같은 영단을 내리게 되었다.
  문리대학을 인문과학대학과 자연과학대학으로 이원화 분리하여 독자적으로 진로를 개척, 발전시키도록 결정하였다. 이때부터 우리 자연과학대학은 화려한 내일을 설계하여 서서히 지향의 막을 올리게 된 것이다. 우리 자연과학대학은 기초과학의 교육과 연구를 하는 전당이 되었다.”
  1980년 초엽에 “종합과학관”이란 공간의 건립을 위한 추진위원회(위원장: 백동기)가 결성되고 곧이어 건립후원회로 발전되어 당시 약 1억원을 모금하였고, 총 4000평 규모의 종합과학관이 1981년 착공되어 1984년에 완공을 보게 되었다. 백동기는 초대 자연과학대학 학장으로 임명되었고 임기 2년 동안 대학과 물리학과를 위하여 많은 일을 하였다. 물론 물리학과는 자연과학대학 소속으로 새로운 도약의 시대를 맞고 있었다.

자연과학대학 시기(1982 - 2000)
  1982년 6월 우선 2000평 규모의 종합과학관 A동이 준공되었으나 이에 필요한 방대한 실험설비, 시설 및 정밀기자재 등을 갖추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예산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난관을 타결하기 위해 이화여대 내에서 “한국여성 과학교육

발전위원회”를 구성, 사업계획서를 독일 교회 중앙발전위원회(E.Z.E)에 제출하였다. 그 결과 독일정부로부터 420만 7000마르크(당시 약 15억원)을 지원받아 종합과학관 내의 기본적인 시설 및 설비뿐 아니라 최신식 실험기자재까지 갖추게 되었다. 종합과학관의 건립으로 연구환경이 완연히 호전됨에 따라 물리학과는 1983년에 대학원 박사과정을 개설하였고, 이때를 전후로 전임교수 2명을 새로 영입하여 물리학과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기초과학분야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고 특성화분야 연구의 구심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하여 설립된 문교부 대학부설 “기초과학연구소” 특성화 연구분야로 천체물리학 분야가 1988년에 지정되고 1993년에는 응집물질물리학 분야도 선정되었다. 이후 이 프로그램이 종료된 2000년까지 많은 연구업적을 이루었고, 동시에 우수 여성인력 양성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1991년에는 한국과 이탈리아가 공동 주최하는 상대론적 천체물리학 학술회의를 개최하였다. 특히, 1993년 11월에는 교육부 4차 5개년 대학부설 기초과학연구소 지원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교수들이 자발적으로 대학원 자연과학분야 교육 활성화를 위한 장학기금 모금을 실시하여 7000여만원의 기금을 단시일에 마련하였고, 이에 대응하여 학교에서도 교육부장관에게 연구비의 25%를 대응비로 지급하겠다는 당시로서 매우 힘든 결정을 하는 등 여성과학자 양성 의지를 천명하였다. 이를 위해 물리학과의 양종만(梁鍾萬)이 총장직속으로 직제가 개편된 기초과학연구소의 소장으로 임명되었고, 이러한 일련의 노력 결과로 지역거점연구소 지정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이화여자대학교는 우리나라 물리학 분야의 여성전문인력을 양성하는 주요한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967년 제14회 한국물리학회의 정기총회 이후 20여년 만인 1989년 4월 29일에 이화여대 물리학과는 제58회 한국물리학회 정기총회를 종합과학관에서 개최하게 된다. 20여년전 문리대학 소속 시절의 빈약한 시설과는 달리 두번째 맞이하는 총회는 새로 건립된 종합과학관에서 개최한 만큼 초청강연 33편과 연구발표 304편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었다.
  1992년 한국대학교육협의회에서 주관한 물리학과 평가를 계기로 종합과학관 준공 이후 다시 한번 비약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1992년 중에 우선 교수 수를 6명에서 9명으로 늘리고 대학본부로부터 3억5000만원의 지원을 받아 학부실습시설을 대폭 확충하고 연구실험실도 기존의 천체물리학연구실, 핵물리학연구실, 고체물리학연구실 외에 광학연구실, 저온물리학연구실을 추가로 설치하게 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이화여대 물리학과는 평가에서 “우수학과”로 인정을 받았다. 이후에도 물리학과의 발전은 계속 이루어져서 1994년부터 1998년까지 3명의 교수를 충원하여 전체 교수수 12명으로 사립대학에서는 드문 큰 규모를 이루게 된다. 1995년에는 물리학과 창립 4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와 기념집 발간이 물리학과 교수와 물리학과 동창회원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현황(2000 - 2002년 현재)
  물리학과가 포함되어 있는 자연과학대학은 이화여자대학교의 15개 단과대학 중의 하나이며, 대학관련 연구소로는 기초과학연구소, 생명과학연구소, 수리과학연구소 등이 있다. 또한 자연과학 발전에 학문간의 긴밀한 정보교환과 협동체제가 필수적임을 감안하여, 기초과학연구소내에 중앙기기실을 두어 각 학과에서 공용으로 이용, 유지하면서 공동연구를 할 수 있게 하고 있다.
  물리학과에는 9명의 전임교수가 소속되어 있으며, 전공별로는 입자물리학 2명, 천체물리학 1명, 고체물리학 3명 (이론1, 실험 2), 원자핵물리학 1명, 통계물리학 1명, 광학 1명이 있다. 교수의 전공분야는 물리학 전분야에 걸쳐서 비교적 고르게 분포되어 있으며, 학부교육의 경우 각 과목의 특성에 맞게 강의가 진행되고 있다.
  물리학과의 시설로는 각 교수의 연구실 9개, 각 실험전공 교수의 연구실험실 6개, 학부실험을 위한 실험실습실이 4개 있으며, 학과소속의 전공도서실 겸 세미나실과 공작기기실이 마련되어 있다. 교육실험설비로는 학부교육을 위한 50종 이상의 기초적인 물리학 실험종목뿐만 아니라 응용성이 높은 전산물리실험을 위한 교육용 PC가 확보되어 있으며 이를 위한 별도의 전산실습실이 물리학과에 소속되어 있다.
  물리학과의 학사현황을 살펴보면, 물리학 전반에 대한 전문지식을 교육하는 학사학위과정과 물리학 각 전공분야의 심도있는 연구를 위한 대학원 석·박사 및 통합 학위과정이 마련되어 있다. 2001년 2학기 현재 학사학위과정에는 126명, 석·박사 및 통합과정의 대학원에는 25명이 재학중이며, 학사 1412명, 석사 161명, 박사 12명을 배출하였다. 이외에도 물리학과는 타계열 학생의 교양이나 자연계열 학생의 기초과목으로 물질 - 에너지 - 우주, 현대물리학과 인간사고의 변혁, 과학과 문화, 우주와 나, 일반물리학, 의학물리학 등을 지원하고 있다.
  1998년부터 실시되고 있는 학부제와 최근 들어 급증하는 이공계열 기피현상으로 물리학을 전공하려는 학부생의 수가 급감하고 있으나, 이화여대가 지도자 장학생(수능 0.1% 이내)으로 선발한 우수한 여학생들이 여전히 물리학을 전공 및 복수전공으로 택하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이다. 또한 시대의 요구에 의해 여성과학자 양성이 시급한 현실에 대처하기 위해서 물리학과 전 교수들은 우수 여성인력 양성에 매진하고 있다.




이화여자대학교 물리학과는 1951년에 사범대학 소속으로 인가되어 1955년에 1회 입학생을 모집, 1961년 대학정비령에 따라 페과 1962년에 문리대 소속으로 복과. 1982년에 자연과학대학으로 소속 1983년에 박사과정 개설.

 

 

 

 

 

 

 

 

 

 

 

 

 

 

 

 

 

 

 

 

 

 

 

 

 

 

 

 

 

 

 

 

 

 

 

 

 

 

 

 

 

 

 

 

 

 

 

 

 

 

 

 

 


물리학과 교수 : 뒷줄왼쪽부터 강원 정병두 김성구 양인상 신승애 모혜정 앞줄 왼쪽부터 이공주복 양종만 우정원 안창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