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기
  전남대학교 물리학과는 1951년 10월 국립 전남대학교 설립인가를 거쳐 이듬해 6월 개교와 동시에 정식으로 발족하게 되었지만(입학정원 20명) 다른 지방 국립대학과는 달리 전남대학교 설립 모체였던 광주의과대학과 사립 대성대학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출발하였다. 광주의학전문학교가 1946년 9월 광주의과대학으로 승격 인가되고 의예과 교육의 필요성과 1947년 9월 2년제 문교부 중등교원양성소가 의과대학에 부설됨에 따라 의과대학에 물리학교실이 창설되었다. 물리학 교수로 최방진(물리, 전자기학), 송계범(역학, 열역학) 두 사람이 물리교육을 담당하였고 전남대학 개교와 함께 물리학과로 부임하게 되었다. 사립 대성대학은 전남의 향교와 유림단체가 설립한 대학으로 전남대학교의 설립과 동시에 학생과 교수 및 모든 재산과 시설을 전남대로 이전하고 전남대학교 문리과대학으로 개편 발족할 것을 전제로 1951년 9월 이학부에 수학, 물리 및 화학과 학생을 모집하게 되었다. 따라서 물리학과는 1952년 6월 개교와 동시에 두 사람의 교수와 2학년 재학생과 함께 출발하였다. 그해 9월 오국주가 임명되고 최방진은 공과대학 전기공학과로 전출되었으나 수년간 물리학과 대학원교육에 겸직하였으며 1953년 이병혁 조교가 임명되어 송계범, 오국주와 함께 강의와 실험실 정비에 노력한다.

유아기
  1954년 조형환(전자기)과 고윤석(핵물리)이 부임하게 되고 1957년 이병혁(전자기) 조교가 승진 임명되며 1959년 조동산(역학), 1960년 윤상현(양자역학)이 부임하게 되나 1956년 연구차 송계범이 일본으로 출국하게 되고 1957년 고윤석이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이 기간 물리학과에는 결국 4 - 5명의 교수가 근무하게 되지만 1957년 문리대 이학부 건물이 준공되면서 처음으로 일부 연구실과 실험실을 갖게 되었으며 1955년 2월 대학원 석사과정이 설치 인가되어 빈약한 실험실 확충을 위한 실험기기 제작 및 연구에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오국주는 파이온 - 핵자 흩뜨림(pion - nucleon scattering)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송계범은 재래식 한글타자기보다 성능이 탁월한 국영문겸용 타자기를 발명하였다. 우선 한글의 자형(字型)을 6종으로 분류하여(가,고,각,곡,과,곽 등 같은 “ㄱ” 이라도 “ㄱ”의 위치와 모양이 다름) 후속문자를 타자한 다음에 선행문자가 지면에 나타나는 일종의 처짐기법을 사용하여 복잡한 한글의 자형과 받침문제를 해결했을 뿐 아니라 오타를 하여도 쉽게 해결할 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 이를 기초로 1958년 일본에서 자신의 텔레타이프라이터를 제작완성하였다.
  한편 이병혁은 유전체의 방전(放電) 파괴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여 유전체에서 방전파괴를 플라스마 이론으로 설명하였으며 이를 활용하여 방전식 자동복사기를 발명하였는데 이는 원고에 점광원을 이동조사(移動照射)하여 흑백에서 반사되는 광량을 광전관으로 분석하여 광원이 흑점에 비추는 동안만 원지(carbon paper)에 방전에 의한 미세구멍을 뚫게하여 등사함으로써 원고를 복사하는 원리이다. 제록스 복사기가 없던 당시로는 이 복사기가 사진을 포함한 자동복사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윤상현은 ZnS 계의 전기적 광학적 특성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는 등 모든 교수의 연구활동은 비교적 활발하였다.

양적 성장기
  1961년 5·16 군사혁명 이후 학부학생 입학정원이 잠시 15명으로 줄어들지만 곧 30명(1968년도), 40명(1978년도), 80명(1979년도)으로 급격히 팽창하게 되었다. 1972년 12월 사범대학에 과학교육학과가 설치 인가될 뿐 아니라 공과대학의 학과증설과 입학정원의 증가로 강의실, 실험실, 실험기기의 부족은 물론 크게 늘어난 교양물리 강의로 강의시간 부담도 급증하게 되었다.
  교수진에도 큰 변화가 오는데 송계범이 귀국하여 1958년 대학을 떠나고 고윤석이 학위취득 후 서울대로 전출하게 되었다. 오국주는 교원 노조관계로 5·16 후인 1961년 7월 면직되나 다행히도 1964년 교수로 복직될 때까지 강사신분으로 강의와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1967년 이병혁마저 서강대로 전출함으로써 학과 창설 교수 중 오국주를 제외하고 모두 대학을 떠나게 되었다. 다행히 1967년 김화택, 1969년 정석종, 1970년 김재근, 1975년 명화남, 1976년 정창섭 등이 보강되었으며 1980년 황용규, 1981년 임기건, 1982년 우정주, 이형종, 이강석이 부임하여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특히, 황용규, 이형종, 이강석은 전임발령으로 임명되기 이전 조교로 근무하면서 학생들과 거의 숙식을 같이하며 그룹 스터디를 이끌어 공부하고 연구하는 학과풍토를 조성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972년 조동산이 사범대학 물리전공으로 전출하고 1976년 정환재, 1979년 김재률(1988년 물리학과로 전입발령), 1981년 오희균, 1987년 김현태, 1989년 임인택이 사범대학 과학교육과에 신규 임명되었다. 물리학과 창설 이래 36년간 물리학과의 발전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오국주는 1988년 2월에 정년으로 퇴임하였으며 1973년 사범대학 과학교육과 개설 이래 학과발전에 노력하였던 조동산은 1991년 8월 지병으로 타계하였다.
  그동안 부족했던 연구와 실험공간은 1977년 6월 자연과학 1호관이 준공됨에 따라 연구실 및 실험실을 확장 이전했으며 1979년 11월 문리과대학이 인문사회대학과 자연과학대학으로 분리되어 물리학과의 소속은 자연과학대학 물리학과로 개편되었다. 학과 실험실습비에 의존하여 교수 스스로 설계 조립하여 사용해온 열악한 실험기기는 IDA/IBRD 제2차교육차관사업으로 1979년부터 1980년까지 고가의 기기가 모두 도입 설치됨으로써 비로소 어느 정도의 실험실습기기 및 연구용 기자재를 갖추게 되었다.
  이 시기(1960년, 1970년대)의 연구활동은 강의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고 열악한 연구기기로 큰 성과를 기대할 수 없었으나 주로 고체물리실험 그룹을 중심으로 II - VI 반도체의 결정 및 박막에서 전기적 광학적 특성 연구, 유전체의 초음파 흡수이상 등을 수행하였다. 1980년대에는 IDA/IBRD 교육차관에 의한 연구기기 도입으로 연구가 보다 활성화되었다.
  그 연구분야로는 반도체내의 깊은 트랩(deep trap)에 관한 연구(윤상현), 반도체의 결정성장, 합성 및 광학적 성질(김화택), 유리 및 세라믹의 구조 및 물성변화(정석종, 김현태), 이온살다발(ion beam)에 의한 박막성장과 물성 및 고체표면 개질(김재근, 우정주), 비정질 금속합금의 제조 및 열적 자기적 특성(명화남), 광학계 설계와 성능평가 및 미세구조에 의한 회절(정창섭), 고에너지 중이온의 충돌에 의한 회절들뜸(김재률, 임인택, 오국주), 구리증기레이저(임기건), 물리교육방법론(정환제, 과학교육과), 저차원 양자액체의 물성(오희균, 과학교육과), 광집적회로(이형종), 쿼크 - 접착자 플라스마 및 상대론적 중핵이온 충돌이론(이강석) 등으로 대부분 교수의 연구와 관심분야가 세분화되던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 우리나라 대학사회의 분위기는 1978년 민주교육성명(교육지표사건)으로 11명의 교수가 해임되고 1980년 광주 5·18 민주화운동으로 많은 학생들이 학사징계를 당하며 다시 11명의 교수가 면직되는 등 암울한 시기로 전남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들은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지만 모두가 연구에만 집착하기에는 어수선한 시기였다.

질적 성장기
  1993년 자연과학4호관(물리학관)이 준공됨으로써 연구실과 실험실을 갖추어 새 건물로 이전하게 되며 1992년 3월 한국표준과학연구원 기초과학지원센터 광주분소가 물리학관 뒤 건물에 개소되고 물리학과 김화택이 분소장으로 취임하여 고가의 연구실험기기를 도입, 설치 활용함으로써 연구여건이 크게 개선되었다. 이 시기 교수채용 제도도 전보다 개선, 보완되어 완전 공개채용으로 우수한 신진 교수들을 영입하게 되는데 1990년 김창섭(비평형 통계역학), 1992년 박내웅(고에너지물리학), 박종원(물리교육방법론, 사대 과학교육과), 1995년 방윤규(응집물리 이론), 윤선현(양자광학), 1996년 조은진(표면물리) 등이 부임하여 연구활동이 더욱 활성화된다. 한편 고체물리 실험팀을 이끌어온 윤상현이 1995년 정년으로 퇴임하였다.
  이 시기의 연구활동은 교육부 학술연구조성비, 학술진흥재단 자유공모, 지방대육성, 신진교수과제, 한국과학재단 특정연구, 핵심전문연구과제 등의 연구비 지원으로 학술연구 활동이 진작되고 건전한 연구풍토가 조성되었다. 기타 신진교수들의 연구와 관심분야는 고체의 전기적 광학적 수송특성의 이론 및 양자 수송문제(김창섭), 저에너지영역의 강작용 현상에서 솔리톤에 의한 중입자 모델(박내웅), 고온초전도체 이론(방윤규), 양자정보과학(윤선현), 전자구조(조은진) 등으로 이론과 실험분야에서 현재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현재 공동연구가 활성화된 실험분야로는 김화택의 다원화합물 반도체의 광학적 특성연구로 이 지역 타대학 교수와 함께 관련분야를 선도하고 있다. 김화택은 그간의 연구업적으로 한국물리학회 학술상(1997. 4. 24), 삼일문화상(학술상 1998. 3. 1) 등을 수상한 바 있다. 김재률은 임인택과 함께 페르미연구소 E653, E843 실험, 일본 KEK E176실험, CERN의 CHORUS 실험 등에 참여해왔다. 특히 김재률은 1991년에 발표한 논문 Direct Observation of Sequential Weak Decay of a Double Hypernucleus(Progress of Theoretical Physics, Vol. 85, No. 6, 1287 - 1298)이 뒤늦게 double - hyper 핵분야의 전개에 있어서 그 출발점으로 인정받아 2002년 3월 일본물리학회 논문상을 수상한 바 있다. 두 사람은 KEK K2K, E373실험, DESY의 ZEUS실험, CERN의 CMS/LHC실험, Super - Kamiokande Project 등에 공동으로 참여하여 활발한 연구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광학연구팀(정창섭, 임기건, 이형종, 윤선현)은 결상광학계연구, 광집적회로연구, 레이저광학 및 양자광학연구를 독자적으로 수행해오다가 광주직할시의 광산업육성방침과 관련하여 “광응용기술연구소”(소장:정창섭)를 대학 부설연구소로 설립하고 1999년 BK21 핵심분야에 “광정보과학연구팀”의 사업명으로 지원을 받아 29명의 석·박사 전문인력을 배출하였으며 이들은 대학 및 연구소, 이 지역의 벤처창업 기업인 (주)피피아이(이형종 창업), (주)새론, (주)우리로통신 등에서 핵심적인 연구개발 업무를 주도하고 있다. 특히 BK21 핵심분야 사업의 수행을 통하여 차세대 WDM 광통신기술에 긴요한 평판도파로 소재 및 소자의 연구개발을 위한 연구기반을 조성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2000년 10월 산업자원부의 기술기반조성사업의 하나로 “광기술특화연구센터”(소장: 임기건)가 설립되어 광기술 연구장비를 확충하였으며 광집적회로용 광소재와 소자제작, 광증폭기 박막소재 및 소자 제작 등 다양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2002년 7월에는 “광소재부품연구센터”(소장:임기건)가 한국과학재단 RRC로 선정, 설치되어 광소재 및 광부품개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2000년 8월에 정석종이 전남대학교 총장으로 취임, 기초과학 특히 물리학과의 발전을 위해 크게 기여하고 있다.




전남대학교 물리학과는 광주전문대학교가 1946년에 의대로 승격된 광주의과대학과 사립 대성대학을 통합 1951년에 전남대학교 설립, 1952년에 의과대학 부설 중등교원양성소의 물리교실과 대성대학 물리학과를 흡수통합하여 문리과대학내에 개설. 1979년 학과가 자연대에 소속. 1955년 석사과정 개설, 1973년 사범대학 과학교육과 설치.

 

 

 

 

 

 

 

 

 

 

 

 

 

 

 

 

 

 

 

 

 

 

 

 

 

 

 

 

 

 

 

 

 

 

 

 

 


자연대 4호관 건물로서 물리학과 전용 건물이다. 각종 학부물리실험실, 학부 정독실, 물리학과 전산실, 도서실, 교수 연구실 등이 있다. 1993년 8월에 입주하여 2002년 현재까지 물리학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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