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기
  한남대학교(구 대전대학)는 미국 남장로교 세계선교회 한국 선교회가 설립주체로서 호남지방을 주된 활동무대로 삼아 1892년 구한말부터 활발히 펼친 선교활동의 일환으로 의료사업과 중등교육사업을 추진해왔다. 1912년 평양의 숭실대학 운영에 참가하며 대학교육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던 해인 1948년 대학설립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1956년 4월에 대전기독학관(입학정원: 성문학과 30명, 영문학과 30명, 화학과 30명)으로 시작하였고 이를 모체로 대학설치기준령에 준해 1959년 4월 대전대학으로 개편되었다.
  이에 따라 수물학과(입학정원 30명)가 정식으로 개설되어 화학과와 더불어 기초과학 영역의 틀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수물학과라는 통합학과로 수학과 물리학의 전공을 다 다루는 교과과정으로 운영하다보니 완전한 물리학과의 틀을 갖추지 못하였다. 한편 물리학과를 설립할 것을 계획하던 학교당국은 미국에서 30세의 젊은 학자인 프린스(Clarence E. Prince, 한국명 박인성, 공학박사, 전자공학전공)를 교육선교사로 초빙하여 1957년부터 한국어 어학훈련을 받게하고 수물학과가 설립되자 물리학 분야의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1959년도에 고병우(고체물리 실험전공)를 전임강사로 초빙하였다. 그리고 출강강사로는 1956년도부터 김봉흡(전북대), 정진종(중앙대), 김근희(한양대) 등 대학교수들을 초빙한 바 있으며 이들은 일반물리 실험실과 실험기구를 준비하여 학과의 기초를 충실하게 닦았다. 1962년 유종인과 최재승이 전임강사로, 1965년에 김철호가, 1966년에 김기완이 전임강사로 부임하여 교수진은 아주 젊은 교수로 보강하였다. 1961년도부터는 매년 특대장학생을 선발하여 우수학생을 유치하는 데 성공하였다.

유아기
  1959학년도부터 수물학과로 시작하였지만 통합교과목으로 학과를 운영하다보니 수학과에 가까운 학과운영을 하게 되었다. 특히 1961학년도부터는 임시교육 특례법에 의해 수물학과 입학정원이 30명에서 20명으로 조정되어 물리학전공을 운영할 수 없는 형편이 되어 수학전공만 운영하게 되었다. 1963학년도에 다시 수물학과 입학정원이 30명으로 조정이 되었다. 1965학년도부터 수물학과를 수학전공과 물리학전공으로 분리하여 각각 교과과정을 독립운영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이때부터 물리학과의 독립성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때 교수진으로는 프린스와 고병우, 유종인, 최재승, 김철호가 있었다. 1966년도에 김기완이 부임하였고 1965년 8월에 최재승이 유학을 위해 학과를 떠났다.
  1964년도에 미국 남장로교에서 “대전대학 과학기재 설비”를 위하여 모금한 돈 7만5000달러를 배정받아 화학과와 물리학과가 실험기기를 구입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는데 그 책임을 프린스가 맡았다. 1956년도부터 미국에서 시작한 새로운 물리교육인 PSSC 물리가 1960년도부터 보급되자 대전대학도 실험기기를 구입하여 1965학년도부터 “기초물리학” 과정으로 PSSC를 도입하고 그 실험방법도 활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충남지방 중등학교 교사들의 재교육에 활용하기도 하였다. 1966학년도부터는 “고등물리학” 교육과정으로 미국에서 거의 동시에 사용되던 버클리물리연구소(Berkeley Physics Lab) 실험기구를 구입하여 사용하였는데 이는 전자기구를 이용한 실험장치로 거시적인 물리세계를 미시적인 전자의 운동을 통해서 물리법칙을 이해시키는 데 효과적인 교육방법이었다. 동시에 전자공학 실험을 위해서는 그 당시에는 미국에서도 최신장비인 Malmstadt Enke 전자실험장치를 구입하여 학부교육에 최선봉의 실험교육을 실시하게 되었다. 이때 도입한 기구들은 당시로서는 학부실험장치로서는 최고수준의 실험장치였고 “철저한 과학교육과 현대적 시설”을 갖추어 “질적 교육을 한다”는 대학목표에 따라 운영하게 되었으며 후에 실험대학으로 선정되는 데 결정적인 평가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1967년 12월 문교부의 인가로 수물학과가 정식으로 물리학과(입학정원 20명)와 수학과(입학정원 30명)로 분리되어 물리학과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8년 12월 졸업식에서 물리학과 첫 졸업생 4명을 배출하게 되었다. 물리학과 발전에 크게 기여하던 프린스가 1968년도에 이임하게 되어 아쉬움이 매우 컸다. 그러나 다시 전자공학을 전공한 박한규를 초빙하여 전자공학 실험을 담당하게 하였다. 1961년도에 자연과학연구소를 설립하였고 교비 지원 교수연구비를 지급하여 교수의 연구활동을 장려하기 시작하였고 유학을 권장하여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양적 성장기
  1971년 건학이념이 같은 서울의 숭실대학과 대전대학이 통합되어 숭전대학교로 출발하였지만 분교 취급을 받던 대전캠퍼스로서는 대학발전의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1972년에 숭전대학교 대전캠퍼스 전체가 문교부의 실험대학으로 선정되었고, 또 지방대학 육성책을 제시한 문교부의 정책이 잘 맞아 대학발전의 큰 계기가 되었다. 물리학과는 1973학년도에 대학원 석사과정이, 1981학년도에는 박사과정이 설치되었다. 박한규가 1970년 신설된 전자공학과로 이동하였고, 김철호가 유학으로 1971년 사임하였고, 김기완이 1974년 경북대로 옮겨갔으며, 유종인이 숭실대로(서울) 1981년에 이동하였다. 그리고 조육(고체물리 이론)이 1975년에, 김춘택(핵물리 실험)이 1979년에, 송기영(고체물리 실험)이 1981년도에, 한만흥(고체물리 실험)이 1982년도에, 장수(응용광학)가 1984년에 부임하여 교수진이 보강되었다. 1983년 2월에 숭전대학교가 서울의 숭실대학교와 대전의 한남대학으로 완전분리하여 다시 재도약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리고 1984년 10월에 이학대학 3815평을 신축·준공하여 실험실과 연구실을 갖춘 완전한 학과로 발전하게 되었다. 1985년 10월에 한남대학이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어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1989년 3월에 교육대학원 과학교육 물리전공이 개설되었다. 그리고 1982년도에는 부족한 실험장비의 보강을 위하여 20만달러의 광정보처리장치를 비롯한 고가의 실험기구 70만달러어치를 OECD 차관으로 구입하여 해결하였다.

질적 도약기
  한남대학교 물리학과의 질적 도약기는 연구의 분위기가 형성되고 대학원 교육이 활성화되기 시작한 1989년부터를 그 시점으로 한다. 즉 1980년대 말까지는 고병우, 김춘택, 조육, 송기영, 한만흥, 장수 등 3개 전공의 6명의 교수로는 수업과 학생지도업무의 과다로 인하여 연구 분위기가 위축되어 있었다.
  1989년 1월에 핀란드 헬싱키대학교의 스티그 스텐홀름(Stig Stenholm)그룹으로 원자광학을 연구하기 위하여 연구년을 떠난 장수는 1년의 짧은 연구기간에도 불구하고 SCI급 논문 3편을 게재하면서 학과에 연구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퍼져나가기 시작하였다. 장수가 1990년 초에 연구년에서 돌아온 후 대학원 활성화를 위한 방안이 조육, 송기영, 장수 등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더불어 1990년 3월부터 학과의 학부 입학정원이 78명에서 60명으로 하향 조정되고 학비가 전액 지원되는 석사과정 대학원생 교육조교(TA)가 10명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연구 진작과 교육환경 개선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1992년 3월에 KAIST 물리학과에서 응용광학으로 박사학위(1987년 2월)를 하고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레이저연구실에서 근무하던 조재흥을 응용광학 전공의 조교수로 임용하여 광학 전공의 교육을 더욱더 강화하는 계기로 삼았다. 1992년도 9월에 독일 함부르크 대학에서 전기공학박사(1990년 2월)를 받고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자기연구실에서 근무하던 손대락을 고체물리(자성물리) 전공의 조교수로 임용하였다. 1992년에 학과 교수 8명이 최선을 다하여 대학교수협의회에서 실시한 학과평가를 받은 결과 전국 30위 권으로 평가를 받았다.
  학과평가를 계기로 학과내의 전공을 크게 응용광학, 고체물리(자성물리), 고체물리(고온초전도 및 전자재료학)의 3개 소전공으로, 각 분야마다 교수 3명으로 실험실 및 연구비를 공유하는 소그룹 연구방식을 도입하였다. 이를 계기로 연구비의 대단위화 및 연구분야의 활성화가 이루어져서 2002년도 현재에 교수 1인당 1년 평균 논문이 SCI급 논문은 0. 1편에서 1편으로 국내논문은 0.5편에서 2편 정도가 나오기 시작하였고 연구비가 교수 1인당 200여만원에서 3000만원 이상이 되었다. 1995년 3월에 미국 애리조나대학교에서 고체물리(고온초전도체 전공)전공으로 이학박사(1990년 12월)를 받고 한국전자통신연구소에서 근무하던 이종용을 조교수로 임용하였으며, 1996년 2월에는 한만흥이 개인사정으로 사직하였다. 이에 따라 각 전공당 원로교수 1인 및 중견교수 1인과 신임교수 1인으로 구성되는 완벽한 연구팀들이 형성되어 대학원의 3 개 전공에 대한 실용적 교육이 이루어지고 연구가 원활히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1990년 이후로 응용광학, 자성재료 및 응용, 전자재료학과 같이 산업체의 기초분야이나 여타 대학에서 많이 하지 않는 실용적인 분야를 선택하여 대학원 교육 및 연구를 하여 대학원생들의 전공 취업률이 100 %가 되었다.
  이러한 대학원 교육 및 연구분야가 잘 정착되어 가는 와중에 1998년부터 학부제라는 새로운 제도하에서 5개 자연과학 전공 학과들이 자연과학부 소속으로 변경되었으며, 물리학과명은 3개 소전공을 의미하는 광·전자물리학 전공으로 바뀌었다.
  학부생들을 엔지니어로 키우는 실용적 교육 및 취업에 대비하여 2학년에는 전자공학실험, 전자기학실험, 전산물리, CAD와 같은 실제 실험시에 필요한 기초공학 과목들을 개설하였으며, 대학원에서 시작한 3개 소전공 제도를 학부 3, 4 학년에 적용하여 학부생들을 전공 실험실별로 나누어 지도하고 4학년은 각 전공별 논문실험을 진행하도록 하였다. 소전공별로 광학기사, 비파괴기사, 전자기사 등과 같은 구체적인 전문기사 자격을 목표로 제시하여 학부생들이 학업에 정진하면 자동적으로 취업에 유리해지도록 커리큘럼을 실용적으로 재구성하여 진행하였다. 그 결과 2001년에는 학부생들의 전공 취업률이 70%가 되었으며, 총 취업률은 100%를 달성하게 되었다.

  2000년 2월에는 고병우와 김춘택이 정년퇴임하면서 학과의 명예교수로 임용되었다. 김춘택의 후임으로는 2000년 9월에 KAIST 물리학과에서 응용광학으로 박사학위를 하고 삼성전기연구소에서 근무하던 임천석을 응용광학(광학계 설계 및 평가) 전공의 조교수로 임용하여 광학 전공의 실용적 교육을 더욱더 공고히하는 계기로 삼았다. 그리고 현재 고병우의 후임으로 고체물리(자성재료 및 응용) 분야의 전공자를 2003년 3월에 공채로 임용할 예정이다. 동시에 기초기술연구회 이사장인 정명세,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의 정낙삼, 김진옥, 이윤우, 박승남과 한국원자력연구소의 이종민, 허영회 등이 객원교수 및 겸직교수로 대학원생 지도나 강의를 통하여 본 학과의 질적 성장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현재상황 및 미래비전
  2002년 현재 학부 및 대학원의 연구 및 교육분야를 응용광학 전공, 자성학 전공, 전자재료학 전공의 3개 소전공으로 나누어 진행하고 있다. 학부 2학년에서는 전자, 기계, 프로그램을 배우며 3학년과 4학년에서는 3개 소전공에 따라 배치되어 각 전공마다 주어진 광학기사, 비파괴기사, 전자기사 자격증을 따도록 2년간 세미나와 실험실습 2학기, 전공논문 2학기를 진행하며, 동시에 여름마다 각 기업체에 2주간의 실습교육을 다녀오도록 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각 분야에 있어서 산업체의 현장감을 익히고 실험실습에 능한 학부생을 배출함으로써 물리적 사고에 공학적 실습 능력을 갖춘 학생이 배출되도록 하고 있다.
  응용광학 전공은 장수(광산란, 원자광학, 광포획), 조재흥(광계측, OTF, 고분자 광소자), 임천석(광학계 설계, 광학계 평가, 조명계 설계 및 평가)이 하며, 학부생들이 4학년 2학기에 광학기사를 딸 수 있도록 2년간 담당교수제로 세미나를 진행한다. 응용광학 대학원에서는 조재흥과 임천석이 DOE 소자 및 의료용 광학부품에 대한 광학계 설계 및 평가, Polychromatic OTF 및 디스플레이에 대한 평가장비 개발과 같은 산업체에 필요한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장수는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이호성팀과 같이 원자광학 및 광포획 분야의 이론 분야에서 세계적 명성을 떨치고 있다.
  자성학 전공에서는 조육(고체물리 이론, 자성물리 이론), 손대락(자기센서, 자성재료, 자기계측)이 Flaxgate 자기장 센서연구, 전기강판의 철손 측정, 자기 이방성에 의한 회전자기 이력 손실 측정, 비장질 변압기의 특성 측정, terfenol - D의 자기변형 특성 측정 등에 관하여 외부 수탁기관으로부터 약 2억원 정도의 연구비를 받아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전자재료 전공 분야에는 송기영(고체물리 실험, 고온초전도체), 이종용(저온 및 고온초전도체 통신용 소자, 양전자 측정)이 차세대 반도체에 관한 측정, 휴대통신용 전자재료 소자 특성측정, 저온 및 고온초전도체 특성 연구, 양성자 소멸 특성 측정 및 응용 등을 연구하고 있다. 광·전자물리학과는 3개의 특화된 전공하에서 연구역량 및 교육 시스템을 집약하여 전국에서 비교우위에 서고자 노력중이다.
  특히 학부생들의 학습동기를 부여하고 실제 취업에 도움을 주고자 실용적인 소전공들 하에서 체계적이고 매우 실전적인 커리큘럼을 운영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대학원 교육과 연계하여 더욱더 산업체의 요구에 맞는 교육 및 연구를 하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2003년 3월에 자성재료 및 응용 분야의 실험전공자 1인을 충원할 예정이며, 지속적인 내부의 경쟁을 통하여 연구 및 교육분야의 대외적 경쟁력이 있도록 3개 전공을 좀더 줄이든지 또는 다른 전공으로 바꾸는 작업을 할 예정이다. 그리고 2002년 현재 교수수가 총 8인(1인은 충원예정)이지만 이를 각 전공당 3 - 4인으로 확대하여 총 10인 이상으로 늘릴 예정이다.




한남대학교 물리학과는 미국남장로교 한국선교회가 1956년 대전기독학관을 시작으로 1959년 대전대학 설립에 따라 수물과로 개설,1967년 물리학과로 독립. 1971년 대전대학교가 숭실대학과 숭전대학으로 통합. 1983년 숭전대학에서 분리 한남대학으로 독립. 1985년에 종합대학으로 승격.1998년 학부제 도입으로 광전자물리전공으로 개편.
1973년 석사과정, 1981년 박사과정, 1989년 교육대학원 과학교육 물리전공 개설.

 

 

 

 

 

 

 

 

 

 

 

 

 

 

 

 

 

 

 

 

 

 

 

 

 

 

 

 

 

 

 

 

 

 

 

 

 

 

 

 

 

 

 

 

 

 

 

 

 

 

 

 

 

 

 

 

 

한남대학교 물리학과 교수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