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은 과학기술 자립을 통한 경제개발을 목적으로 1966년 2월 10일에 설립되었다. KIST의 물리학 분야 활동은 자연히 응용과학 및 관련기술 방면으로 국한되지만 연구자 개인에 따라 과학적인 성취를 추구한 이도 있다. 물론 과학과 기술의 구분이 명백하지 않을 때도 많지만. KIST 설립 초기부터 물리 분야는 기초과학을 추구해도 좋다는 인정을 받기는 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란 초기명칭을 1981년 과학원(KAIS)과 통합될 때까지 사용하다가 1981년에 과학원과 통합되면서 한국과학기술원(KAIST)으로 개명하였고 1989년부터 다시 분리하면서 현재의 명칭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영문은 예전의 KIST로)을 사용하고 있다. 1981 - 1989년 동안의 두 기관의 통합은 비교적 형식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그 기간의 KAIS부분의 역사는 여기서 취급하지 않는다. 1980년대 들어 연구사업의 성격이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는 우리 경제 근간이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탈피하여 산업기술의 고도화가 불가피해짐에 따른 변화였다. 한국경제의 급격한 성장을 의식한 선진국들의 기술보호장벽 높이기에 따라 산업기술의 고도화, 자생적 연구개발 능력의 배양, 기존 연구개발 능력의 집중을 통한 연구개발 추진력의 극대화, 특정 분야에서의 선진국 수준 기술개발 등이 필요하게 되었다. KIST 물리연구 그룹이 국제학술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인데 1987년까지만 해도 한국물리학회의 예산이 부족하여 학회에서 직접 발송하지 못하고, 대회용 논문집이나 KPS 발간 「새물리」 잡지 등을 물리학회 사무실에 가서 직접 가져와 배포했을 정도였다. 먼저 KIST의 설립배경 등을 알아보고, 물리 관련 연구실 별로 회원들의 활동을 간추려 본다.

KIST 설립

(1) 설립배경
  1960년대 정부는 “자립경제 달성을 위한 기반구축”을 목표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 - 1966)과 병행하여 제1차 과학기술진흥 5개년계획(1962 - 1966)을 수립, 추진하게 된다. 이는 산업구조의 개선과 산업의 근대화를 통한 공업화 과정에서 과학기술이 차지하는 역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 저력을 배양하기 위해서인데 인력개발, 기술개발, 기술협력을 근간으로 하였다. 당시 과학기술연구기관의 대종은 국공립 연구기관이었는데 우선 숫적으로도 부족하였지만, 다음과 같은 네가지 이유로 산업기술개발에 충분히 기여하지 못하였다. 1)연구의 자율성이 보장되지 못함 - 정부예산에 의해 일반행정부서의 감독아래 운영되었으며 각종 법령, 규정에 의한 제약. 2)월평균 40달러 정도의 낮은 처우문제, 3) 연구비, 시설, 문헌 등 인프라 미비, 4) 산업기술과의 격리 등이다. [1)과 2)는 40년이 지난 2002년 현재도 문제점이 부각되고 있다.]

(2) 설립 준비
  1965년 5월 18일 박정희 대통령의 방미시 존슨 대통령과의 영수회담에서 한국의 공업발전에 기여할 종합응용 연구기관 설립에 공동지원할 것을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경제기획원 기술관리국에서는 “연구소설립준비 자문위원회”를 구성하고 설치방안을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는데 그 목적을 1) 산업발전에 직접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기술제공 및 연구수행, 2) 재외 한국과학기술자의 국내유치 및 연구활동지원, 두가지를 설립목적으로 내세웠다. 한편, 미국측은 대통령 과학기술특별고문 D. F. 호닉을 단장으로 하는 6명의 조사단과 바텔기념연구소 부소장, E. E. 스로우터를 단장으로 하는 바텔기념연구소 조사단을 연달아 파견하여 조사보고서를 미대통령 및 양국 정부에 각각 제출케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국내 최초의 계약연구기구인 한국과학기술연구소가 1966년 2월 10일에 탄생하게 되었다.

(3) 기본이념
  캐나다의 NRC(자율성 확보), 미국의 바텔기념연구소(계약연구), 호주의 CSIRO(국가발전에 필요한 연구과제의 우선적 선정), 독일의 MPI(기본·응용연구의 균형 및 연구소·대학간 유대), 일본의 이화학연구소(연구실단위 독립성) 등의 연구기관을 참고로 하여 기본 이념을 1) 연구의 자율성, 2) 재정적 안정성의 보장, 3) 합리적인 연구분위기의 조성, 과 같이 정하고 이에 따른 운영 기본방침을 정하였다. 바텔기념연구소와는 자매연구기관이 되었다.

(4) 건설 및 조직
  연구소의 건설은 그 설계, 자금사용, 자재구매 절차 전과정에 연구소와 바텔기념연구소, ACMA의 합의와 한·미양국정부의 승인을 거쳐 미국의 공사감리제도를 따랐으며 이 공사를 위해 특별히 구성된 육군 공사조정통제단의 지원을 받았다.

(5) 준공기념 담배와 기념우표
  1969년 10월 23일 준공식을 기념하여 전매청은 당시 고급담배인 신탄진에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이름과 전경을 실어 200만갑의 기념담배를 제작하였고 체신부는 KIST 로고 등을 추가하여 7원권 100만장의 기념우표를 발행하였다.

연구분야

(1) 고체물리연구실(1968 - 1972)
  최형섭소장이 방미하여 당시 벨연구소에 재직중이던 정원을 유치하여 고체물리 연구실장으로 하였고, 계약연구를 기본으로 하는 KIST였지만, 고체물리연구실만은 기본연구비로 연구를 수행케 배려하였다. 1967년 가을, 1968년 봄에 민석기, 강광남, 조희삼웅 등 연구원을 확보하여 처음 시작한 과제는 Si에 Au 전극을 입힌 쇼트키 접합에서 금속원자들이 반도체에 침투하여 주는 영향과 Si에 방사선의 영향을 구로공단에 나가거나 원자력연구소의 TRIGER Mark II 노심에서 실험하였다. 후에는 액정 표시소자의 개발로 1972년 “네마틱 액정의 물리적 성질에 관한 연구”, “액정의 연구 및 액정의 디스플레이 개발 연구”, 탁상시계, 손목시계용 표시기 시제품을 선보였다. 1970년 초에는 실리콘 단결정(VPE), 실리콘 제어 고르개(silicon controlled rectifier), GaAs, GaP (적색LED, 1969), 유리질 반도체(1970 - 1972), 고체전해질(1972) 등이 주요 연구과제였다.

(2) 반도체 재료연구실(1972 - 1997)
  1972년 고체물리연구실을 개명하여 반도체 재료연구실로 하였다. 정원이 실장을 계속 담당하다가 1976년 3월 한국 표준연구소로 옮기면서 민석기가 실장직을 이어받았다. 주요 연구업적은 국내 최초의 실리콘 웨이퍼 제조 및 소자용 박막재료기술, 화합물 반도체 단결정 및 에피기술, 나노미터 반도체 양자소자기술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실리콘 반도체 단결정 성장 연구는 국내 반도체 산업이 태동되기 전인 1978년에 시작하여 1981년 국내 최초로 초크랄스키 방법으로 직경 4인치, 무게 13kg의 무결함 단결정 성장에 성공하여 1985년까지 동부산업(주)과 기업화 공동연구를 수행하는 등 우리나라 실리콘 웨이퍼 제조기술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민석기(고려대), 강광남(과학기술정책연구원, STEPI), 조희삼웅, 김종준(서울대 반공연), 홍도유(대유시스템), 김형대(대지안경원), 김옥기(재미), 최인훈(고려대), 정지채(고려대), 이기호(단국대), 조재신(모토롤라), 김현수(경상대), 김춘근, 김성일, 김무성(AMK연구소), 김용태, 조훈영(동국대), 김용(동아대), 김은규(한양대), 박승철(재영), 엄경숙(재캐나다), 유인석(서울대), 한철원(재미), 박영균(유일반도체), 심광보(한양대), 황규운(재미) 등이 연구에 참여하였으며 2001년 에피탁시 팀은 나노소자연구센터로 옮겨갔고, 시스템부에 남은 인원들은 소자용 박막재료기술(김용태), MAV(김성일)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3) 응용광학연구실(1972 - 1996)
  독일에서 유학한 김웅(작고)이 귀국하여 실장을 맡았으며, 최상삼이 1975년 9월 1일 뒤를 이었다. 김기순(작고), 김신근, 이재하, 박단(작고), 조재철(JCJ Korea), 한기관, 오봉환, 김상국(이상 Laser & Physics), 김선호, 이종창(홍익대), 정영철(광운대), 송계휴(광주과기원), 김병윤(KAIST, 노베라), 김명욱, 주홍(레이저옵틱), 김상혁, 박경현(ETRI), 변영태, 김재헌 등이 연구에 참여하여 국내 최초의 광섬유 제조기술개발(금성전선과 공동연구), 각종 레이저 개발, 어븀 첨가 광섬유 증폭기, 편광유지 광섬유 제조기술 개발, 광섬유 결합기 개발, 집적광학 및 초고속 광스위치, 렌티큐라 방식에 의한 입체영상기술, 광섬유 브래그 그레이팅(FBG)을 이용한 각종 센서 및 광통신용 부품 개발 연구를 수행하였다. 다음에 소개하는 “청와대 도청사건” 일화는 당시 이 연구실의 위치를 가늠하는 데 도움이 된다. 박정희 대통령 때, 뉴욕타임스지에 미국 CIA가 청와대 도청을 한다는 기사가 보도되면서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에서 국내 전문가로 KIST 응용광학실의 최상삼을 찾아 레이저 도청의 원리와 가능성, 대책을 물은 일이 있다. 청와대에 불려들어간 최상삼은 미대사관 건물이 눈에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고, 연구소에 돌아와 박단, 조재철과 함께, 행정동을 겨냥하여 연구실에서 레이저를 쏘아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연결하여 행정동에 있는 여직원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때 또 KIST에서 제작한 He - Ne 레이저가 소문이 나서 삼성에서 이것이 국내 제작이 가능한지 와 보기도 하였다.

(4) 광전자연구실(1986 - 1996)
  반도체 재료연구실의 강광남이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광전자연구실을 창설하였다. 초기에는 짧은 채널 Si - MOSFET 트랜지스터의 노쇠화 현상, 마이크로파용 GaAs MOSFET 제조기술 및 수동소자 라이브러리 제조기술 등 마이크로파 한판집적회로의 국내 최초 연구를 수행하였다. 1993년 국내 최초로 반도체 에피장비인 화학빔 에피탁시(CBE)장비를 갖추게 되어 III - V 족 화합물 반도체를 이용한 광전소자의 개발에 힘썼다. InP MSM 수광소자, 광변조기, 매트릭스 광스위치, 양자우물의 무질서화, 화합물반도체·절연체의 계면성질 연구 등이 주요 연구주제였다. 이유종(동의대), 이명복(경북대), 최병진, 김동명(국민대), 한일기, 이정일, 우덕하 등이 연구에 참여하였으며, 후에 홀로그래피 연구팀(손정영)이 합류하였는데 이 분야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연구실이다. 강광남은 1992년부터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전문위원을 시작으로 과학기술부 조정관, 조정실장, STEPI 원장을 역임하였다.

(5) 고온초전도 연구그룹(1987 - 2002)
  1987년 돌발적으로 발견된 온초전도현상의 회오리바람에 KIST에서도 초전도 연구그룹이 형성되었으며 주로 초전도 박막재료 연구에 힘썼다. 고온초전도 연구협의회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최상삼(한국광기술원장), 한택상(한국광기술원), 염상섭(주,우영 연구소장), 이상영(건국대), 이주영(재미), 김동호(영남대), 김영환, 박종혁(한국광기술원,) 등이 연구에 참여하였으나 2002년 현재는 김영환이 혼자 남아 있다. 한택상이 이끄는 주력그룹은 한국광기술원으로 옮겨가 초전도 뉴프런티어 사업의 디지털 전자소자 분야 연구를 담당하고 있다.

(6) 광기술연구센터(1996 - 2002)
  1996년 말, 응용광학연구실과 광전자연구실이 통합하여 광기술연구센터가 성립되었으며 김선호, 조재철, 이상배가 실장직을 이어 담당하였다. 후에 반도체 재료연구실의 에피탁시 팀이 합류하여 박사연구원 22명의 막강한 연구센터가 되었다. 그러나 IMF의 여파로 시행된 구조조정결과 이중 3분의 1 이상이 기업으로 또는 타연구소로 전직하였다. 2001년 5월에는 6명이 신설된 미래기술 연구본부의 나노소자연구센터로 옮겼다. 주로 차세대 광통신분야의 소재, 부품, 통신시스템(OTDM) 등에 관한 대형사업을 수행하였으며, 국가지정연구실(FBG를 이용한 광섬유센서연구실, 이상배, 1999)을 유치하였다. 2002년 현재 주력 연구분야는 OTDM, 광변조기, 광논리소자 구현 및 광섬유 격자소자 및 센서 시스템 분야이다.

(7) 나노소자연구센터(2001 - 2002), 양자기능소자연구팀
  2001년 KIST는 국책연구소로서의 면모를 일신하기 위하여 조직개편을 단행하면서 미래지향적인 원천기술의 확보를 위하여 “미래기술 연구본부”를 창설하고 마이크로시스템센터와 나노소자연구센터를 설립하였는데 나노소자연구센터에 광기술센터의 일부 인원이 참여하게 되었다. 이정일, 박용주, 조운조, 한일기, 최원준, 김회종(한국광기술원) 등이 화합물 반도체 결정성장(양자우물, 양자선, 양자점 등)과 이를 이용한 고출력 반도체광원(국가지정연구실, 한일기, 2001), 단전자소자, 실리콘나노결정, ZnOx 박막, GaN, 광자띠틈재료(PBG), 양자점 레이저 다이오드, 양자우물 및 양자점의 무질서화(파장가변), MOSFET의 광반응 등을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나노소자센터의 자성재료 팀과 협력하여 스핀트로닉스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있다.

(8) 컴퓨터 및 정보통신 분야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전산물리를 전공하던 성기수가 1967년 KIST의 전자계산개발센터 담당 부장으로 유치되면서 한국의 전산분야 연구가 태동되었다. 1970년대 초부터 컴퓨터에 의한 중학교 무시험 추첨, 대입예비고사채점, 체신부 전화요금계산시스템, 정부부처업무, 관세시스템, 금융기관의 전산화 등 수많은 국가과제를 수행하였다. 또한 이의 개발, 운용을 위한 인재 양성에도 힘써(오길록, ETRI원장) 전산인력 배양의 국가센터가 되었다. 1983년 8월 3일부터 전자계산실이 전자계산개발실과 전자계산기운영실로 분리되면서 이용태(삼보컴퓨터)는 전자계산기운영실장을 담당하였다. 정만영이 실장을 담당한 전자장치연구실은 ETRI의 모태가 되었다.

(9) 재료분야
  맹선재는 초창기(1968. 4. 1) 재료시험실을 개설하여 물리분야 연구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최주(작고)는 고온초경량 합금재료 분야에 많은 연구업적을 냈으며, 특히 전통과학기술에 관심을 가지고 고대 제철로를 복원하고 과학문화재단 홈페이지에 고대과학기술에 대한 강의록을 수록한 바 있다. KIST 전통과학기술센터장을 역임하였다.
  김윤호는 한국요업학회, 한국분석과학회, 한국세라믹학회, 한국결정학회 등의 부회장을 거쳐 한국결정학회의 회장직을 담당하여 한국의 세라믹 연구분야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II-VI족 화합물반도체(머큐리/캐드뮴/테룰라이드) 적외선 수광소자 분야를 꾸준히 연구해 온 서상희는 2002년도 나노소재 뉴프런티어 사업단장으로 선정되었다.

맺는말

  KIST소속 물리학회 회원들의 연구활동을 종합해 보면 반도체물리와 광학분야를 비롯, 재료, 전산, 통신 분야에서 우리나라 IT(정보기술) 산업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할 수 있다. 실리콘 단결정 및 화합물 반도체 재료 분야와 광섬유 제조 및 소자기술, 레이저 기술, 고온초전도 재료기술 등 IT산업의 핵심부분을 국내에서 선도해 온 것을 알 수 있다. 전산, 통신 및 재료 분야에서도 독특한 기여를 하였다. 출연연구기관으로서 KIST는 미래 원천기술의 확보에 노력해 오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러한 임무를 수행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2002년 전후에 대두되고 있는 NT(나노기술) 분야에서도 이를 바탕으로 국내 연구의 선도 나아가서는 세계 연구 경향을 주도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NT에서 새롭게 인지해야 할 것은 기존 학문들의 융합이다. 물리, 화학, 생물의 융합, 광과 반도체의 융합, 광자와 전하와 스핀의 융합 (KIST 기관고유사업으로 진행되고 있는 Vision 21 스핀트로닉스 연구과제) 등은 필연적인 학문발전 과정인 것처럼 보인다. 이 후 학회활동도 분과회간 협력, 학회간 협력 등이 중요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KIST소속 회원들의 학회활동도 왕성하여 반도체 분야의 회원들은 물리학회 내에서 특히 반도체물리학분과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으며, 임원으로, 간사, 편집위원 등으로 학회활동에 기여하였다. 민석기는 2000년도 한국물리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광학 및 양자 전자학 분야에서 활동하던 광학 분야 회원들은 1990년 한국광학회를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김웅과 최상삼은 각각 한국광학회 제3대 및 제7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참고자료]
[1] 한국과학기술연구소10년사, 발행인 한상준, 1977.
[2] KIST 25년사, 한국과학기술연구원, 발행인 김은영, 1998.
[3] KIST 30년사, 한국과학기술연구원, 발행인 박원훈, 1998.


 

한국경제와 국민에게 응용과학과 기술의 혜택을 가져오게 하는 새로운 기관을 창설하는 데 있어 협조하기로한 양국 대통령의 1965년 5월의 합의사항을 상기하면서 양 대통령은 한국에 있어 생활과 공업의 현대화에 대하여 기초적이며 중대한 공헌을 할 것이 분명한 한국과학기술연구소를 장차 설립하려는 힘찬 진전에 대하여 만족히 생각한다. - 1966. 11. 2. 한·미 양국대통령 공동성명에서, 연구소설립 기념탑.

 

 

1966년 2월 10일 KIST 정식 발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