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재(朴哲在, 1905-1970)는 1905년 10월 9일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행소리에서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두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라났다. 어려서는 서당에 다녔으나 삼촌의 도움으로 양평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24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졸업뒤 경상남도 산청공립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여기서 모은 돈으로 1926년 연희전문학교 수물과에 입학하여 가정교사를 하면서 1930년 졸업했다.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2년간 계속 연구생으로 있다가 그 학교의 조교로 임명되어 1932년 일본 교토제국대학 이학부 물리학과에 위탁생으로 파견되었다. 교토제대에서 박철재는 요시다를 만나 그의 연구실에서 조수로 일했다. 당시 교토제대는 독일의 김나지움 수준에 해당하는 고등학교를 나와야만 입학이 허가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연희전문학교는 그러한 수준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때였다. 박철재는 처음 교토제대에 위탁생으로 요시다의 조수로 일하면서 그의 마음에 들어 요시다의 도움으로 교토제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박철재를 교토제대에 입학시킬 방법을 찾던 요시다는 교토제대에는 정식 과정인 본과와 아울러 선과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본과는 반드시 대학 예과에 해당하는 수준의 고등학교를 나온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었으나, 선과는 그렇지 않은 사람도 받아주는 예외 규정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선과로 교토제대에 입학한 사람은 없었는데, 요시다가 박철재를 선과에 입학시켜 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교토대에서 정식으로 공부할 수 있게 된 박철재는 요시다를 비롯한 교토제대 교수들의 인정을 받고, 그뒤 연희전문학교 출신들은 박철재가 한 방식대로 교토제대의 선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1934년부터 1943년까지 10년 사이에 박철재의 추천으로 교토제대에 유학이 허락된 사람은 20명 가량 되었다. 1940년대에 윤세원이 교토대학 이학부 우주물리학과에 입학하여 공부할 수 있었던 것도 박철재가 앞길을 열어놓았기 때문이었다.
  교토제대에서 공부하게 된 박철재는 처음에는 엑스선에 의한 셀루로즈에 관한 연구를 하였으며, 1940년 생고무의 결정화에 관한 연구로 교토제대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엑스선을 이용하여 생고무의 결정, 생고무 분자의 모형, 생고무의 과냉각 현상, 생고무 결정 구조의 온도 의존성을 기술한 이 논문의 내용은 당시 태평양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일본으로서는 아주 중요한 국방전략연구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 논문은 1941년 3월 일본 학술연구회의편 물리학 강연집(1) 금속물리학편에 게재되었다.
  박철재는 1945년 교토대학에서 강사로 임명되었으나 해방되어 고국으로 귀국하여 경성대학 문리대 물리학과 교수가 되었다. 1948년 문교부에 들어간 박철재는 1950년부터 기술교육국장으로 재직하면서 우리나라의 실업교육 제도를 확립했으며, 원자력연구소 창설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그는 한국물리학회가 창설되던 1952년부터 1959년까지 학회의 초대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1962년 물리학회의 명예회원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인하공과대학과는 창설 초기부터 깊은 관계를 맺어왔는데, 1964년부터는 이 대학의 학장이 되었다.
  박철재는 1955년 미국 국립오크리지연구소에서 방사성동위원소에 관한 기술훈련을 받았으며, 그해 제네바에서 열린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국제회의에 한국 수석대표로 참가했다. 그는 원자력 연구개발을 전담할 행정관서의 창설을 주장하였으며, 원자력법 제정과 원자력원 창설에 크게 기여했다. 1958년에는 우리나라에 설치할 연구용 원자로의 구매단장으로 미국에 가서 3개월에 걸쳐 미국원자력위원회와 교섭하고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한미쌍무협정에 근거하여 미국원자력위원회로부터 35만달러의 원조를 얻어냈다. 이리하여 그는 제너럴 아토믹 회사와 TRIGA MARK II 연구용 원자로의 구매 설치 계약을 체결하였다. 1959년 마침내 원자력원이 창설되자 초대 원자력연구소 소장으로 약 1년 반 동안 재직하면서 원자력연구소 설립 초기의 기반을 닦았다. 박철재는 학술원 창립 시기인 1954년 5월에 학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이듬해 5월 자연과학분과위원장이 되었고, 1963년에는 문화훈장 국민장을 받고, 1970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김근배 『일제시기 조선인 과학기술인력의 성장』
          (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96).




박철재(1905~19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