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5월 4일부터 1952년 5월 31일 해체되기까지 부산, 대구, 전주, 광주에 임시로 운영되던 전시연합대학이 기초가 되어 부산대학교(1951년), 경북대학교(1951년), 전남대학교(1951), 전북대학교(1951), 충남대학교(1952년) 등 5개 국립대학교와 조선대학교(1951년), 고려대학교(1953년), 중앙대학교(1953년), 성균관대학교(1954년), 동국대학교(1955년), 한양대학교(1955년) 등의 사립대학교에 물리학과가 새로 설립되어 물리학 저변인구가 확대되는 데 기반을 마련했다.
  부산대학교는 1946년 5월 15일 설립되었으나, 예과 중심으로 운영되다가 중학교 6년제 졸업자가 입학한 해인 1951년 4월 수물학과가 설립되었다. 초창기 수물학과는 김규태(金奎泰), 한화석(韓華錫) 등에 의해서 운영되었다. 특히 김규태는 부산대학교의 수물학과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피난당시 부산대학교 수물학과는 피난온 서울지역 교수들의 도움을 받았다. 현정준, 김상돈, 지창열, 윤세원, 김철수 등은 모두 당시 부산대학교에서 강의했던 인물들이다. 부산대학교 수물학과도 1962년 대학정비기준령으로 폐과되어 이범삼만이 물리학과를 지키다가 1964년 3월 다시 학과가 소생하였다.
  경북대학교 물리학과는 1951년 경북대학교의 설립인가가 나면서 창설되어 1952년 4월 신입생을 모집함과 동시에 구 대구대학 이과계열 학생의 일부를 흡수하여 물리학과에 편입시켜 시작되었다.
  초창기에 활동한 주요 인물들은 라병욱(羅炳旭), 조병하(趙炳夏), 진영선(秦榮善), 강영호(姜榮浩), 박동수(朴東秀), 홍한식(洪翰植), 정기호(鄭基鎬), 김병찬(金炳贊) 등이었다. 본래 대구사범학교의 수물과에는 손계술, 최종락, 정기호 등이 재직하고 있었는데, 손계술은 1948년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학장이 되었고, 1955년 정기호는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에서 문리과대학으로 옮겼다. 1954년에는 최초로 학과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대학원도 1953년에 설립인가가 되어 1957년에는 최초의 물리학 석사 1명을 배출하였다.
  조선대학교 물리학과는 1951년 12월 문리학부 수물학과로 시작하였다. 1953년 3월 조선대학교가 종합대학교로 승격하자 문리과대학 수물학과로 개편되었다가, 1963년에 수물학과가 수학과와 물리학과로 분리 개편되었다. 물리학과의 핵심인물은 조판상(曹判尙)이었다. 그는 1951년 5월에 부임하여 1986년 2월까지 무려 35년을 이 대학에서 재직하였다. 이외에 박정규, 이승희, 정종식, 정영구 등이 초창기 물리학과 교수진을 구성하였다.
  전북대학교는 1951년 10월 5일에 설립허가를 받아 전시연합대학으로 운영되다가 1952년 6월에 국립전북대학교로 개교하였다. 전북대학교 물리학과는 전시연합대학 시절부터 개설되었으며, 개교당시 노판우, 김근희, 백동기 등 세명의 교수로 시작하였다. 전북대학교 물리학과는 1955년에 1회 졸업생으로 단 두명(권숙우, 이덕현)을 배출했다.
  전남대학교는 1952년 당시 신설된 대성학교를 흡수하여 개교하였다. 사립 대성학교는 일본인이 경영하다가 폐쇄된 제사공장에서 1951년 개교한 학교였다. 1952년 당시 정원 20명으로 개교한 문리과대학 물리학과는 제사공장 건물에서 2년간 강의하고, 광주의전예과 건물로 이사하였다. 1952년에서 1953년 사이의 전시에는 전시연합대학 체제로 운영되었다. 당시 교수진으로는 최방진, 오국주, 이병혁, 조순탁, 고윤석, 송계범, 조형환 등이 있었다. 전남대학교 물리학과는 1956년 윤상현, 오세영, 김수일 등 최초의 졸업생 3명을 배출했다. 이 가운데 윤상현은 그해 물리학과 교수로 합류했다. 충남대학교는 1952년 5월 25일 설립허가를 받았다.
  충남대학교 물리분야 학과는 문리과대학 내에 이학과란 이름으로 물리학, 화학, 수학이 통합된 학과로 출발하였다. 초창기의 이학과는 조병원, 강석규 두 사람이 주축이 되어 물리학과 설치를 위한 준비작업을 하였다. 1954년 이학과는 물리학과, 화학과, 수학과로 분리되었고, 이에 따라 충남대학교에서도 정식으로 물리학과가 설립되게 되었다. 물리학과 초창기에 합류한 교수들로는 시골의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던 천광현, 오희필 등이었다.
  고려대학교 물리학 관련 학과는 1953년 3월 피난지인 대구시 원대동 임시교사에서 40명 정원으로 신입생을 모집한 수물학과로 시작되었다. 초창기 수물학과는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를 겸임하고 있던 최종락(崔宗洛)과 이론 원자핵물리학이 전공인 김정흠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었다. 1953년 8월 환도하면서 최종락이 사임함에 따라 서울대의 권녕대가 겸직교수로 학과를 정비했다. 1954년 2월 수물과는 물리학과와 수학과로 분리되었고, 권녕대 후임으로 김상돈(金相敦)이 부임하고 한준택(韓俊澤)이 합류하였으며, 1956년에는 노봉환(魯鳳煥)이 충원되어 초창기 교수진용을 갖추었다.
  성균관대학교 물리학과는 1954년 2월 설립되었는데, 초대 학과장은 박흥수(朴興秀)가 맡았다. 박흥수는 이때부터 1967년 2월까지 12년 동안 물리학과장을 역임하면서 성균관대학교 물리학과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박흥수는 해방 전 일본 도쿄물리학교 출신으로 해방 후 동아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1953년 3월 성균관대학교 약학과 초대 학과장으로 부임하였다가 이듬해 물리학과가 설립되자 학과장이 되었던 것이다.
  동국대학교 물리학과는 1954년 2월 설립되었다. 초창기 교수진은 김영함, 김현창, 김현남, 오신근, 김준명, 양인기 등이었다. 그뒤 김현창은 성균관대학교로, 김현남은 아주대학교로 옮겼으며, 오신근 및 김준명은 외국으로 이주하였고, 대신 조병하가 부임하였다. 교수들의 잦은 이동으로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1958년에 물리학과 1회 졸업생 15명이 배출되었다.
  한양대학교 물리학과의 본류는 1955년 2월 한양공과대학 수물학과로 시작하였다. 수물학과는 1956년 2월 한차례 폐과되었다가 1958년 2월 다시 복과되고 1959년 2월 종합대학 승격과 함께 문리과대학 물리학과로 정식으로 인가받았다. 초창기 전임교수는 전종국(全鍾國), 김의훈(金義薰), 최선근(崔善根) 등 3명이었다. 특히 1954년 한양대학교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뒤 줄곧 한양대학교 물리학과에 재직한 김의훈은 초창기 공학관련 학과뿐이었던 한양대학교에 물리학과를 신설하고 발전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고려대학에서 한준택 교수가 부임함으로써 물리학과는 활성화에 접어들었다.
  대학에서 물리학과가 생겨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윤세원은 1953년 3월 부산 피난시절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대학 1학년생을 위한 물리학 교재를 번역하여 출판했다. 이 교재는 하우스먼과 슬랙(Houseman & Slack)의 「일반물리학」을 번역한 것으로 대한민국 역사 이래 처음으로 물리학 교과서가 출간되어 물리학 교육에 커다란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전시연합대학이 기초가된 5개 국립대학과 6개 사립대학에 물리학과가 집중적으로 설립된다.

 

 

 

 

 

 

 

 

 

 

 

 

 

 

 

 

 

 

 

 

 

 

 

 

 

 

 

 

 

 

 

 

 

 

 

1953년 3월 윤세원은 하우스먼과 슬랙의 「일반물리학」을 번역출판했는데 우리나라에서 대학 물리교과서가 출간되기는 이것이 최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