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를 통해서 세계적으로 제3세계에서 선진국으로 빠져나가는 과학기술 분야의 두뇌유출(Brain Drain) 현상은 개발도상국의 과학기술 발전에 많은 저해 요인으로 작용했다. 한국도 그 예외는 아니었으며, 1950년대와 60년대를 통해서 진행된 두뇌유출은 심각한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육이오전쟁이 끝난 뒤 많은 사람들이 유학을 떠나기 시작했으며, 1950년대 중반 이후에는 심지어 대학교수들까지 유학의 길을 나서기 시작했다. 더욱이 1955년부터 문교부 원자력과를 거쳐 원자력원이 설립된 후인 1964년까지 해외에 파견된 요원은 237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국비, IAEA 자금, ICA 콜롬보계획 자금 및 기타 외국 지원금에 의해서 외국으로 나갔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귀국하지 않았고, 일단 귀국하더라도 다시 외국으로 나가는 일이 많았다. 이외에도 여러 경로를 통해 외국으로 유학을 떠난 사람들이 계속 증가해 1960년대 말 재미 한국 과학기술자의 수가 2-3천명에 달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리하여 미국에서 활동하는 과학기술자들과 국내 과학자들 사이에 협조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1968년 9월에 오하이오주의 콜롬부스에서 열린 한국과학기술연구 심포지엄에서 남캘리포니아대학의 김영배가 국내 과학자들과 재미 한국과학자들 사이에 협조를 위한 조직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뒤 1971년 제2대 과기처장관이 된 최형섭과 한국물리학회 초대 미국지부장 이기억 사이에 논의가 진행되었고, 그해 11월 중순 과기처 김형기 연구조정관이 미국으로 건너가서 김순경을 비롯한 발기 준비 위원들과 협의하여 협회의 창립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1971년 12월 11일 워싱턴 D.C. 윈저 파크호텔에서 재미 과학기술자 69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 발기인대회가 열렸고, 이로써 재미과학기술자협회가 창설되었다.

재미과학기술자협회 창설 임원단

발기준비위원 김근영 김순경 김영배 김완희 이기억 이휘소 장극 전계상
정연훈 외
초대회장 김순경
부회장 김영배 이기억 김완희 노준희
간사장 김호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