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물리학회 내의 분과회가 늘어나면서 분과회 자체 활동도 더불어 활성화되었다. 학회 창립후 50년 동안 특기할 만한 분과회 행사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원자핵물리학분과회의 핵물리 여름학교 및 심포지엄
  1988년 8월 16일부터 20일까지 설악산에서 핵물리학 심포지엄이 열렸는데, 이것은 국내에서 열린 최초의 국제적인 핵물리학 심포지엄이었다. 이 심포지엄은 다음해 여름부터 여름학교와 병행해서 추진되었고 그 이름을 “Nuclear Summer School and Symposium”(약자로 NuSS)으로 바꾸어 제12회까지는 매년 개최되었다. ‘NuSS ’99’가 1999년 6월 21일에서 25일까지 경주에서 열림으로써 매년 열리던 행사는 12회로 끝나고, 다음부터는 격년 행사로 바꾸어 2001년에 13회 NuSS가 열렸다. 이 행사는 주로 서울대학교 민동필이 조직하였고, 처음에는 대우학술재단의 후원으로 시작하여 과학기술처의 국제협력연구비 및 서울대학교 이론물리연구센터(CTP)의 지원으로 계속되다가 제7회부터는 거의 CTP의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이 학술모임은 처음 시작할 때부터 국제적으로 유명한 핵물리학자들을 초청해서 국내의 학생 및 교수들에게 외국의 최근 연구결과와 훌륭한 강의에 직접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는 점에서, 또한 모든 강의 및 연구논문 발표가 영어로 이루어지고, 그 회보가 발간되어, 후에 학생들에게 유용한 자료가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학술적 의미가 크다. 특히 이들 회보는 JKPS의 보충호로 1992년(제5회)과 1993년(제6회)에 걸쳐 두번 발간되었고, World Scientific 출판사를 통해서도 2번, 그리고 미국 AIP Conference Proceeding 494호로 발간되는 등 국제적인 심포지엄으로 자리잡아갔다.

한국물리학회창립 50주년 기념 응집물질물리 심포지엄
  2002년 2월21일부터 23일까지 부산대학교에서 ‘한국물리학회창립 50주년기념 응집물질물리 심포지엄’이 열렸다. 이 심포지엄에는 응집물질물리 분야의 국내 연구실 대부분이 참석하였으며 200여명 이상의 회원들이 65편의 발표에 참가하여 활발하게 토론을 하였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과거의 응집물질물리 심포지엄과 다른 독특한 점은, 국내 각 연구실을 소개하는 포스터발표를 처음으로 시도하였으며, 외국의 유명학자들을 초청하는 대신 연구의욕이 왕성한 국내 교수들과 연구원 그리고 관심이 있는 대학원 학생들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응집물질물리 연구의 활성화를 도모하였다는 점이다.

국제 플라스마 과학 및 기술 연합학술대회
  1981년 플라스마 물리학 분과회의 발족 이래 처음으로 국제 플라스마 과학 및 기술 연합학술대회가 한국물리학회, 한국진공학회, 제주대학교, 그리고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공동으로 제주 서귀포 롯데호텔에서 2002년 7월 1일부터 4일까지 우리나라 플라스마 분야에 대한 연구활성화와 기술교류 및 정보획득을 위해 국내외 학자 및 세계적 과학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APCPST는 1989년부터 시작된 한일 플라스마 학회를 1992년부터 매2년마다 한·중·일 삼국이 주축이 되어 개최하는 플라스마 학술대회로서 플라스마 과학분야에 대한 국제학회로 발전되었다.
  2002년에 개최된 국제학술회의 개최는 그동안 플라스마물리학이 우리나라 반도체를 비롯한 전략산업의 핵심요소 기술로 발전된 산업체의 적용기술과 연구개발에 기여한 성과를 돌아보고 향후 새로운 기술분야에 대한 연구개발 방향을 확립하기 위하여 기획된 것이었다. 기획 학술회의 개최로 일본 고야마 (Koyama, 일본 플라스마학회장), 미국 창 디아즈(F. Chang-Diaz, NASA 우주비행사), 러시아 크루클리야코프 (Kruglyakov 학술원 회원), 보스웰(R. Boswell, 호주 시드니대 교수, 공정용 플라스마장치 최초 발명자) 등 12개국 520명의 참석자와 487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응용물리학분과회의 첨단 신소재 및 신소자 과학기술국제회의
  응용물리학 분과회에서는 연례적으로 개최하여 오던 응용물리 심포지엄을 1996년부터 매 3년마다 개최하는 첨단 신소재 및 신소자 과학기술국제회의 (International Conference on Advanced Materials and Devices : ICAMD)로 발전시켜 심포지엄의 국제화를 이루었다.
  제1회 국제회의는 1996년 6월 11일부터 13일까지 사흘간 피닉스파크에서 열렸다. 주된 내용은 점점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는 응용물리학의 여러 분야의 물리학적 이해와 논의였다. 총 200명이 (국내 참가자 160명, 국외 참가자 40명) 참가하였고, 7편의 총회 초청강연, 45편의 초청구두발표와 120편의 포스터발표로 큰 성황을 이루었다. 이 학술회의에 발표되고 투고가 된 논문은 전문적인 논문심사를 거쳐 SCI에 등재되어 있는 JKPS에 수록되었다. 제1회 첨단 신소재 및 신소자 과학기술국제회의가 한국에서 또한 한국물리학회 응용물리학분과회의 주최로 이루어진 데는 사뭇 그 의의가 크다. 먼저 세계적인 학자들이 미국, 유럽, 일본 등 각지에서 대대적으로 참여하여 최신의 이론과 실험에 대하여 질 높은 논문을 발표하였고, 나아가 신소재 및 소자에 대한 연구는 공학분야의 학회에서 주로 다루고 있으나 그에 대한 기초적인 연구가 활성화되어 있지 않아서 한국 과학계 및 공학계의 구조적인 문제로 남아있는 실정에서 이 학술회의의 성공적인 개최로 말미암아 학문간의 불균형을 깨뜨리고 서로의 불신을 종식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제6회 레이저분광학 심포지엄

  광학 및 양자전자학분과회에서 개최한 여러 학술행사 중에서 가장 의미가 있다고 기억되는 행사는 1998년 11월 3-4일 이틀간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열렸던 제6회 레이저분광학 심포지엄을 들 수 있다. 당시 주변여건은 IMF 경기침체의 여파로 국내경제가 최악의 상황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기술혁신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주변 연구환경은 더욱 더 열악해지고 있었다. 어려운 때였지만 우리가 경제산업에 기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묵묵히 탐구하는 과학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행사가 준비되었다.
  이 학술모임에는 당시(1997년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미국 국립표준연구소(NIST)의 필립스(W.D. Phillips)를 비롯하여 10여명의 외국 석학들이 초청되었고, 초청강연 15편을 비롯하여 총 78편의 논문이 발표되었으며, 미국, 일본, 독일, 호주, 러시아 등 8개국에서 약 200명의 관련분야 전문가들이 참석하였다. 후에 이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우수 논문들은 소정의 심사를 거쳐서 JKPS 특집호로 발간되었다. 당시 주된 관심사는 전년도 노벨물리학상 수상 분야였던 원자광학 분야였으며, 그밖에도 원자물리이론, 첨단 레이저 분광기술, 고출력 레이저 기술 및 응용, 비선형 광학, 차세대 레이저 등에 대한 분야가 포함되었다.

천체물리학분과회 일반강연 개최
  천체물리학의 주제는 물리학 중에서도 일반에게 가장 친근하며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최근 기초과학, 특히 물리학에 대한 관심이 현격히 줄어드는 상황에서 천체물리학 분과회는 중·고등학생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물리학을 홍보하기 위한 시의 적절한 일반강연을 개최하였다. 첫번째 일반강연은 학회 50주년 행사의 일환으로 2001년 10월 20일에 전남대에서 실시하였다. 강연주제는 “있으나 느낄 수 없는”이었고, 광주 및 전남지역의 중고등학생, 대학생, 과학교사 등 약 500명 정도가 참석하였다. 양종만(이화여대)이 “에너지의 근원-중성미자”, 김정욱(고등과학원)이 “우주탄생의 비밀 - 진공에너지”, 김선기(서울대)가 “우주의 본질-암흑물질”, 손동철(경북대)이 “물질의 근원-힉스입자”, 박명구(경북대)가 “우주의 종말-블랙홀”이란 주제로 발표하였다.
  첫번째 강연이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근거로 2002년 4월 19일에는 부산컨벤션센터에서 두번째 일반강연을 실시하였다. 이때 양종만, 김선기, 손동철이 동일한 주제로 강연을 실시하였고, 부산지역 고교 및 대학생 500여명이 참석하였다. 50주년 행사가 열린 2002년 10월 24일 한양대 백남음악관에서 서울지역의 중·고등학생 및 일반인을 대상으로 페이지( Don N. Page)가 세번째 일반강연을 하였다.

포스터 발표의 활성화

  1990년까지 한국물리학회의 총회에서는 거의 모든 논문이 구두로 발표되었다. 하지만 회원수가 증가하고 발표 논문이 1000여편에 이르자 이 모든 논문을 구두로 발표하기에는 시간적, 공간적 제약이 너무 크다는 문제점이 제기되었다. 이런 문제점을 해소하는 동시에 논문의 심층 논의를 가능케 하는 새로운 포스터 발표 방식이 채택되었다.

  한국물리학회에서 최초의 포스터발표(Poster Session)가 이루어진 시기는 1991년 4월에 서강대학교에서 열린 제62회 정기총회때였다. 4월 28일 당시 15개의 포스터 보드를 제작하여 시범적으로 실시되었다. 그뒤 포스터발표는 점차로 확대되다가 1996년 가을학회 때부터 포스터발표가 본격적으로 확대되었다.
  포스터 발표 방식이 활성화되면서 총회의 프로그램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총회에서의 구두발표는 초청 연사급이나 특별논문 발표로 한정되면서 발표 논문의 질적 향상과 보다 많은 관심을 유도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물리교육 개선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과 같이 새로운 프로그램들이 마련되었으며, 대부분의 대학이 모든 전문 분야의 전공교수를 다는 확보하지 못한다는 점을 감안하여 학회 차원에서 교육강좌를 도입하게 되었다.

학회의 정보화 추진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전세계를 통해 정보화가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런 국내외적인 변화에 부응하기 위해 한국물리학회는 학회의 정보화를 추진하였다. 한국물리학회에 컴퓨터가 들어온 것은 1988년 5월의 일이었다. 당시에 현대전자는 IBM 286 컴퓨터를 기증하고, 삼보컴퓨터에서 프린터를 기증하여 최초의 전산작업이 시작되었다.
  1992년 3월 학회에서는 IBM 286 컴퓨터 4대와 레이저프린터 1대, 도트프린터 1대를 연결하여 사무자동화의 시작과 함께 논문관리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전산업무를 시작하였다. 이어서 1993년 10월에는 회원관리프로그램을 자체에서 개발하였으며, 학회의 전산업무 개선을 위한 사무자동화위원회를 구성하였다.
  1994년 1월에는 학술지 출판용 KPS·TeX의 개발에 착수하였으며 한국과학재단의 지원으로 8월에 전국을 순회하며 시연을 거쳐 1995년 1월부터 KPS·TeX를 활용하여 「새물리」, JKPS, 「응용물리」 등의 학술지를 발간하기 시작하였다.
  1996년 1월 학회는 과학기술학회 정보화 촉진을 위한 시범화 사업에 착수하였으며, 1996년 3월 전용 서버인 Sun Ultra Spark을 구입하고 전용선(T1)을 확보하여 6월 1일 근거리통신망인 LAN을 개통하였다. 학회의 홈페이지는 http://mulli.kps.or.kr로 등록했으며, 이때부터 전자우편으로 논문이 투고되기 시작하였고, 8월에는 학회 역사상 처음으로 총회의 발표 초록이 전산으로 접수되었다.
  1999년 5월 민석기 회장과 황정남 학술지 편집위원장은 업무를 시작하면서 그동안 추진되어온 정보통신망을 통한 편집업무를 강화하여 JKPS 게재 논문은 PDF(Portable Document Format)로 만들기로 하는 등 JKPS의 온라인화 및 전자출판을 추진하였다.
  전자출판을 위하여 1999년 12월 이후 학술지 제출 논문은 TeX로 작성 투고하도록 했으며, 그림 파일은 EPS(Encapsulated Post Script), PS(Post Script) 파일 등으로 송부하도록 하였다. 또한 논문심사의뢰와 심사평은 e-mail로 송부토록 하였으며, 긴급 투고제도도 신설하여 운용하게 되었다.
  2000년 2월 학회는 전용서버 Mulli2를 구입하였고, 4월에는 학회 홈페이지에 물리학의 대중적인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 Q&A를 개설하였다.

학부제의 도입과 한국물리학의 위기

  2002년 말까지 우리 나라 대학교에 설립되어있는 물리학과(과학교육과 물리교육전공 포함)의 수는 85여개가 넘는다. 육이오 전쟁 이전까지는 겨우 6개 대학에 물리학과가 설립되어 있었으나, 전쟁을 겪는 동안 과학교육 특히 기초과학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은 정부와 선각자들이 대학교를 설립할 때 물리학과와 화학과를 필수적으로 개설하기 시작하여 1950년대에 지방 5개 국립대학과 10개 사립대학(교)에 모두 20여 개의 물리학과나 물리교육과가 운영되었다. 1960년대에는 서강대, 숙명여대, 영남대 등 3개 대학의 설립과 함께 물리학과가 개설되었고, 1970년대에는 7개의 물리학과와 4개의 과학교육과 물리교육전공이 개설되었으며 1980년대에는 대학 자율화의 물결을 타고 24개의 대학교에 물리학과가 개설되어 물리학의 교육과 연구가 이루어졌다. 1990년 이후 물리학과를 개설한 대학도 20여개교나 된다.
  우리 나라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지 50 - 60년 동안에 물리학과는 우리의 과학과 기술을 세계적 수준으로 이끌어올리는데 중추적 역할을 한 인재를 양성하면서 발전하였다. 특히 1992년 대학교육협의회에서 실시한 학과 자체평가는 물리학과가 크게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각 대학교 물리학과에 우수한 신임교수들이 대거 임용되고, 연구 및 교육용 실험실과 기자재들이 크게 확충됨으로써 물리학과와 학회는 절정의 시기를 맞는 듯 하였다. 그러나 1995년 5월 세계화·정보화 시대를 주도할 신교육체제 수립의 명목아래 유사학과를 통폐합하는 정부당국의 대학교육개혁 기본취지에 따라 실시된 “학부제”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물리학과는 정부당국과 학생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상황에 이르렀다.
  학문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획일적인 학부제 실시로 기초학문이 심각하게 위축되고 있다. 응용학문분야 계열에서는 학부제가 가능하겠지만, 순수 기초학문인 인문과학과 자연과학분야에 학부제 실시는 나무의 실 뿌리들을 묶어놓아 고사시키는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기초과학분야의 물리학, 화학, 생물학, 지구과학 등은 통(폐)합하여 학부제로 운영할 수 있는 유사 전공 성격의 학문들이 아니다. 이들 학과에서는 1학년 전공기초과목들을 교양 공통으로 수강하도록 하고, 2학년에 전공을 결정하여 공부하도록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지만 물리학을 전공하겠다고 지원하는 학생들이 갈수록 적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고등학교 이과학생들이 대학입학 수능시험에서 물리를 선택하는 비율이 수 % 밖에 되지 않는 상황에서 자연과학계열의 대학에 입학한 후 물리학을 전공하겠다고 지원하겠는가?
  자연과학의 학문특성은 교과목들의 우선 순위가 계단식으로 이루어진 지극히 체계적인 학문이다. 기초 수학과 물리를 배우지 않고 화학을 배울 수 없으며, 기초 물리와 화학을 배우지 않고 생명과학을 배울 수 없고, 기초 물리학·화학·생물학을 배우지 않고 지구환경과학은 물론 공학·농학·의학을 배울 수 없음을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 고등학교 이과 학생에게 과학 과목 중에서 우선 순위가 분명한 물리를 수학과 함께 필수로 부과해야 하는데도 수능준비에 부담이 된다고 해서 물리도 화학·생물·지구과학과 함께 선택으로 부과하는 정책으로 인해 물리 수능 결여로 대학에서 물리학을 기피하게되고 나아가서 이공계 기피현상이란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상되었다.
  이공계 기피현상은 고등학교 물리의 선택화에도 관련이 있지만, 사회에 진출한이공계출신들이 능력과 노력에 알맞은 대우를 받지 못한데 더 큰 이유가 있다. 선진국이나 중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이공계 출신의 고위공직자가 많다. 고시 합격자만이 상위 업무 수행 능력자로 인정받는 사고를 바꾸면 이공계 기피현상은 사라질 것이다.
  학부제 실시로 가장 영향을 많이 받는 학과가 물리학과이다. 고등학교에서 물리교육을 받지 않은 학생에게는 물리학은 어려운 학문이며, 졸업 후 취업도 잘 되지 않는다고 느껴 물리학과를 지원하는 학생들이 갈수록 줄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85개가 넘는 물리학과중 규모가 큰 학과를 제외하고는 많은 수의 물리학과들이 명칭과 교과과정을 바꾸어 취업 쪽으로 물리교육을 끌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기초학문분야의 특성을 무시한 획일적인 학부제가 계속 유지된다면 대부분의 물리학과나 물리학전공은 공과대학 등에 흡수·통합되어 “물리학과” 기능을 유지하는 학과는 거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동안 꾸준하게 증가해오던 물리학과의 수가 오히려 감소하기 시작하였으며, 물리학회 회원수도 정체 내지는 감소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또한 10년에 10배씩 성장하던 학회의 재정도 1999년 이후에는 5억원 근처에서 정체상태로 접어들었다.
  물리학이나 물리교육이 육성·발전되지 못하면 결국은 물리학에 관한 교육과 연구가 부실해질 것이고, 그렇게되면 한국물리학회의 발전이 저조해질 것이며, 결국 우리 나라의 과학과 기술발전의 뿌리가 약하게 될 것이다. 정부의 교육정책이 바뀌어 기초학문 분야에서 학부제가 폐지되지 않는 다면, 물리학과와 물리학회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획기적인 교육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한국 물리학회에서는 홍보잡지인 “물리학과 첨단기술”에 “물리교육의 혁신”란을 1993년부터 기획하여 고등학교 물리를 선택 부과함으로써 물리교육에 나타날 심각한 문제점들을 분석·연구하고 그 해결책을 제안하는 마당을 마련하고 있다. 1996년 학부제 실시 시작부터 학회와 물리교육분과회는 물리학과의 생존을 위한 특별 심포지엄을 총회 때마다 개최하고 있다. “학부제 실시에 따른 물리학과의 방향”, “물리교육의 혁신-대학의 물리교육 이대로 좋은가?”, “학부제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기초학문 육성”, “물리교육의 위기 -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물리교육 정보화에 대한 특별강연”, “문화적 상황속 물리교육”, “물리학습의 흥미와 탐구력 향상을 위한 여러 가지 접근” 등 물리학과의 발전과 물리교육의 개선을 위한 심포지엄을 실시해오고 있다. 2002년 10월에는 “물리학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주제로 미·영·일·중국 물리학회장들과 세계적인 물리학자들을 모시고 물리학회 창립 50주년 기념심포지엄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또한 물리교육에 관심을 갖는 각 대학교 물리학과 및 물리교육과 교수들이 많은 논문을 발표하면서 물리학과의 생존 전략과 물리교육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여성 과학기술 인력의 부상과 물리학회 여성위원회 신설

  지난 50년 동안 한국물리학회에서 여성의 참여는 극히 저조하였다. 한국물리학회의 첫 여성 이사(박애주)가 학회 창립 이후 30년이 지난 1985년에 탄생했다는 것만 보아도 그동안 여성이 물리학 분야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매우 미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성 인력의 활동이 미약했던 것은 비단 물리학의 경우만은 아니었고 과학기술 전반에 보이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여성과학기술자는 이화학당을 거쳐 1900년 미국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한 김점동(金點童, 박에스터)이었다.
  일제시대에 대학에서 과학기술을 전공한 여성인력은 전체의 0.2%인 17명 정도였다. 해방 후 여성들의 과학기술 진출은 좀더 활기를 띠게 되었으나 여성들의 고등교육 기회는 여전히 제한적이었다. 문교부의 조사에 따르면 1973년말 외국에서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국내에서 활동을 하고 있던 여성 과학기술 인력은 42명에 불과했다.
  여성으로 과학기술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은 1950년대 후반부터 나타났다. 대학 졸업 후 미주로 유학을 떠난 생물학의 이유한(李瑜漢, 미국)과 김윤덕(金潤德, 캐나다), 화학의 모정자(牟貞子, 미국), 장혜원(張惠媛, 미국), 물리학의 조균행(趙均行, 미국) 등이 초창기에 학위를 받은 대표적인 여성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국내로 돌아오지 않고 외국에서 남아 활동을 했다.
  여성 과학기술자들이 국내 대학에 자리를 잡으며 활약을 하게 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였다. 물리학의 이영희(李英姬, 비엔나대 박사 1966년), 모혜정(毛惠晶, 루이지애나주립대 1969년), 생물학의 이현순(李賢順, 서울대 박사 1966년), 화학의 김수자(金秀子, 테네시대학 1968년) 등은 국내외에서 학위를 취득한 뒤 국내에서 활약을 한 초기의 인물들이었다.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한국물리학회에서 여성 회원은 꾸준하게 증가하여 왔다. 여성 인력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높아지고 물리학을 전공하는 여성 인력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물리학회 내 여성과학 문제를 전담할 위원회가 필요하게 되었다.
  한국물리학회 산하 여성위원회를 발족하려는 움직임은 2002년 3월초에 유네스코 후원으로 정광화, 김영순, 우정원 등 한국의 대표 3명을 포함한 세계 65개국의 대표 3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여성물리학자 국제대회 (International Conference on Women in Physics) 행사가 그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이 행사에 한국 대표가 참석한 이후 한국물리학회는 2002년 4월 19일 부산에서 개최한 한국물리학회 총회에서 특별위원회로 ‘여성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초대 여성위원회 위원장은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 재직하고 있으며, 대한여성과학기술인회 회장이었던 정광화가 맡았다. 여성과학기술 인력 활용의 중요성을 인식한 정부는 이미 이혜숙 이화여대 수학과 교수를 단장으로 하는 “와이즈(WISE: Women Into Science and Engineering)”라는 미래의 여성 과학기술 인력 육성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었다. 학회의 여성위원회는 이 WISE 프로그램과 연합하여 여성 과학기술 인력 진흥과 관련된 다양한 행사를 추진하였다.


2002년 4월19일 한국물리학회의 특별위원회로 여성위원회가 발족되었다.